啟平把“現代”和“傳統”嫁接得天衣無縫,他游走在“現代”這個時間之維上,但是,又仿佛是生存在“古代”的意蘊里,他的畫作有一種沉酣的、玄遠的、古意的美。這種美值得你反復凝視,它會慢慢地浸入你,把你帶進某種空曠虛無,某種沉醉里。我常常會為他的畫作感動,他是少數幾個能感動我的畫家之一,但是,事實上直到如今,我依然不能為他的畫作命名、定位。或許,最優秀的作品,大多數的情況下,也是最難以說清楚的,因為它的感動、它對你的介入常常是莫名的。
余啟平生于六朝古都南京,那是中國南方思想和氣質的中心,也許余啟平的確是受了這種氣息的影響。紅色的磚墻,黑色的瓦片,山形的瓦脊,一幢又一幢房子參差重疊著,但是你并不覺得那些參差重疊的屋子里會有人居住。太安靜了,太寂靜了,畫面上沒有一點聲響,一條石板路,由下而上,由寬至窄,由近處往遠處,從密集的屋舍中間穿過去,路邊的一排生長得異樣粗壯的大樹,大樹被月光照得明暗相間,在粗壯的樹干和枝椏間,天空被月光映亮了,大而圓的月亮剛剛升起在黑色的屋脊之上,月光下的小路晶晶亮亮,光滑的青石路面變成了淺淺的橙褐色……余啟平筆下的大地、房舍、月光、路途都是沉靜著的,仿佛無所依憑地懸浮在真空之中,滲透著某種超越的、渴盼脫離的傾向。
余啟平筆下的人呢?空洞的院落,斑駁的磚墻,探出一樹綠的葉,橙黃色的木門,暗褐色的門鎖,門緊閉著,鋪著白色桌布的小圓桌莫名地擺在石板路的當中,桌子、陶壺、陶杯,暗紅的明式靠背椅,五個人散淡地分立著,在石板路上,在窗口,他們在做什么呢?他們凝神觀望,舉頭看那剛升起的月。余啟平筆下的人和大地是一樣的,他們并不是大地上的什么精靈,他們只是大地的一部分,和大地一樣地沉酣月光、綠樹、紅墻、黑瓦之間。
余啟平為我們展示的是一個懵懂、微熏、未醒的世界,這里是物我兩忘、他我不分的。一切都老了,屋子老了,屋子里的東西也老了,但是,這里的意蘊、境界、生機卻依舊,時間是不能帶走那懵懂未開的思想之花和意境之花的,它們也許恰恰是在這之中棲息著,豐潤的肌膚,鮮紅的袈裟,璀璨的手鐲,半醒半寐的青春的夢,點亮了陳舊的世界,但依然是沉酣和半寐的,絲毫也不刻意、張揚。
余啟平給我們鑄造了一個懵懂的世界,它內斂、含蓄、沉酣,但在世的真理卻綻放著,它能喚起你的寧靜感,對于持存之物的專注和渴念,沖突被消解了,化成了對本真抒情的渴求,對神秘歡樂的向往——在這里智慧是沒有意義的,真正有意義的是對審美生存的沉酣。
這種追求也體現在余啟平的繪畫技巧上,他深刻地理解了中國畫的種種傳統技法,但是,又對他們做了現代主義的改造,并在此基礎上形成了自己獨特的繪畫語匯,這種語匯構成了“新東方主義”審美傾向的語匯基礎。我非常喜歡余啟平的這種繪畫美學:一種滲透著極其濃厚的新東方意味的風格和傾向。它不是佛家禪意的簡單復歸,也不是道家出世思想的再現,而是在現代背景之下,通過對機械、擁擠、忙碌、無謂等在世狀態的規避,而顯現出的對人的本真在世狀態的追求和闡釋,我將它命名為“新東方主義”繪畫:它追求的是無我不分、渾然未醒、混沌整一。
葛紅兵
上海大學 文學院 教授
2003年在上海
여계평의 회화미학
여계평(余啓平)은 “현대”와 “전통”을 흔적 없이 접목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현대”라는 시간적인 차원에서 한가로이 거닐기도 했고 “고대”라는 심오한 영역에서 생존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원하고 진한 옛 풍의 미적 감수 속으로 푹 취해 들어가는 듯한 감수를 받는다. 이런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다시 응시할 가치를 느끼게 되며, 차츰 스며드는 느낌이 더해지면서 넓고 허무한 기분에 휩싸이게 한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 할 때가 많다. 그는 나를 감동케 하는 얼마 안되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하여 명명할 수도 정위할 수도 없다. 아마 대부분 우수 작품은 다수 경우에 어떻다고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특유의 감동을 주면서, 보는 자에게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여계평은 남경에서 태어났다. 남경은 중국 6대 왕조의 옛 수도로, 중국 남방지역의 사유방식과 스타일을 대표하는 중심지 이도 하다. 여계평은 이런 지역적인 풍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붉은 담벽, 검은 기와, 산모양의 지붕 용마루, 하나 또 하나의 가옥은 들쑥날쑥 하게 중첩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중첩된 가옥을 보면서 그 속에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생각은 없다. 화면이 너무나 조용했기 때문이다. 너무 조용하다. 화면을 통해 그 어떤 소리도 느낄 수 없다. 돌판을 깐 길은 마을 아래에서 위로, 가까운 데서 멀리로 뻗어 갔고, 밀집한 가옥 사이를 가로 질러 점점 좁게 보인다. 길가에 한 줄로 자라난 큰 나무들은 이상할 정도로 굵고 단단해 보인다. 달빛을 받아 큰 나무는 명암이 분명하다. 굵은 나무줄기와 가장귀 사이로 보이는 하늘가는 달빛 속에서 유난히 밝아 보인다. 크고 둥근 달은 검은 지붕 용마루 위로 떠 오른 지 얼마 안 된다. 오솔길은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낸다. 평평하게 잘 다듬어진 청석 길은 담담한 오렌지 빛이 감도는 갈색을 나타낸다……여계평의 작품 속에서 대지, 가옥, 달빛, 도로는 고요한 사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무런 기탁도 없이 진공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무엇인가를 초월하고 이탈하려고 시도하는 욕망이 내배 이고 있다.
여계평의 작품에서 인물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텅 빈 정원, 얼룩이 간 벽돌담, 파란 잎이 달린 나뭇가지, 꼭 닫긴 오렌지색 나무문, 흰색 천을 덮은 작고 둥글게 생긴 탁자는 이상하게도 돌판 길 중앙에 놓여 있다. 탁자, 도자기 주전자, 도자기 컵, 명나라 식의 검붉은 등받이 의자, 다섯 인물은 화면 속에 널려 서있다. 석판 위에 서 있는 사람, 창가에 서있는 사람. 이 사람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걸 가? 고개를 들고 떠오르는 달을 응시하고 있다. 여계평의 그림을 보면 인물은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생겼다. 그들은 대지에서 살고 있는 요정은 아니지만, 대지의 한 부분으로, 대지와 함께 달빛, 푸른 나무, 붉은 담벽, 검은 기와 속에 푹 취해 살고 있다.
여계평은 모호하고, 약간 그을려도 깨여나지 못한 세계를 우리들 앞에 드러내고 있다. 사람과 사물을 모두 망각해 버리고 서로간을 구분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늙어가고 있다. 가옥도 가옥 안에 방치된 물건도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운율, 경지, 생기는 변함없다. 시간은 미숙하고 피지 않은 사유의 꽃과 무드의 꽃을 가져가지 못한다. 바로 이 속에서 살면서 풍만한 피부, 붉은 가사(袈裟), 빛나는 팔찌, 어렴풋한 청춘의 꿈,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낡은 세계를 밝게 비추고 있다. 전과 다름 없이 취한 듯한 꿈같은 기분에 떠 있다. 의도적이고 선양적인 요소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여계평은 그 자신 특유의 모호한 세계를 만들어 냈다. 비록 내성적이고, 함축성 있고 심취하는 세계라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진리를 꽃피우고 있다. 이 세계를 통해 보는 자는 조용한 분위기가 그리워 지며, 소지하고 있는 사물에 전념하고 그 것이 더 간절히 그리워진다. 충돌이 풀리고 진실한 감정을 갈구한다. 신비한 즐거움을 지향하는 이 곳에서 지혜는 별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심미 생존에 몰두하는 그 자체에 참된 의미가 존재한다.
여계평의 이런 추구는 그의 회화 기법을 통해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그는 중국화(畵)의 다양한 전통 기법에 대하여 심각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전통 기법에 대하여 현대주의적인 변혁을 진행하여 특유의 회화적인 언어를 창출해냈고 이런 언어를 통해 “신동방주의(新東方主義)”심미 경향을 띤 언어 기반을 구축했다. 나는 여계평의 “극히 농후한 신동방적인 의미를 침투시킨 스타일과 경향”을 띤 회화 미학에 매혹됐다. 이는 불교의 선의(禪意)에 대한 단순한 복구가 아니고, 도가 출세 사상의 재현도 아니며, 현시대를 배경으로 기계적이고 혼잡하고, 분망하며 무의미한 현존 상태에 대한 교묘한 회피를 통해, 인간 본디의 참된 상태에 대하여 추구하고 해석한다. 나는 그의 그림을 “신동방주의”회화로 명명한다. 이 신 동방주의는 피차를 구분하지 않고 전혀 깨어나지 못한 혼돈의 일체화를 추구하고 있다.
갈홍병(葛紅兵)
상해대학 문학원 교수
2003년 상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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